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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영화 <매란방>과 소프트 파워 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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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4-15 13:53 조회18,2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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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란방梅蘭芳:1894-1961, 메이란팡)은 중국 경극(京劇) 역사의 전설이다. 그런 그의 삶을 다룬 영화 <매란방>이 다음 주말에 국내에서도 개봉된다고 한다. <매란방>은 천카이거 감독이 3년 넘게 지극한 공을 쏟은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카이거 감독에게 경극과 매란방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베이징 문화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베이징 토박이이자 매란방과 개인적인 인연도 갖고 있다. 그가 어렸을 때, 매란방의 손자와 친구였던 덕분에 매란방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하얀 옷을 입고 검무를 추던 당시 최고의 배우 매란방을 볼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중국의 문화적 아이콘인 경극과 경극의 아이콘인 매란방을 어떻게 그렸을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일부 영화팬들에게는 장국영이 살아 있었더라면 제격이었을 매란방 역을 여명이 어떻게 소화할지도 가외의 관심거리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매란방>은 최근 중국의 문화적 흐름 속에서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흥미롭고,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요즘 중국에서는 정부는 정부대로, 민간은 민간대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자부심이 갈수록 각별해지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의 시대정신이라고 할만하다. 민간에서는 일종의 문화민족주의 흐름 속에서 공자에서부터 갖가지 전통 공예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중국 전통문화가 새로운 사상 지표와 새로운 생활문화가 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중국 정부 역시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데 분주하다. 민족통합, 국가통합을 위해서도 그렇고 전통문화를 앞세워 중국의 새로운 이미지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중국 정부는 요즘 세계에 새로운 중국 이미지를 전파하는데 심혈을 쏟고 있고, 전통문화를 앞장 세워 ‘부드러운 중국’ ‘문화 중국’ ‘매력 있는 중국’을 세계에 선보이기 위해 갖가지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런 흐름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공연이었다. 전통문화를 앞세워 강하고 힘센 중국, 무(武)와 남성 이미지의 중국보다는 부드러운 중국, 문(文)과 여성 이미지의 중국을 세계에 전시하여 새로운 중국 정체성을, 새로운 중국 이미지를 전파하려 한 것이다. 지금 중국은 전통문화를 앞장 세워 세계와 새롭게 만나려는 소프트 파워 전략에 진력하고 있다.

 

이런 문화적 흐름 속에서 보자면, 천카이거의 신작 <매란방>은 2000년대 초반 중국 시대정신의 상징이다. 과감하게 말하자면, 영화 <매란방>에는 2000대 초반 중국인들의 마음과 시대정신이 들어 있다. 영화에서 매란방은 무엇보다 중국의 문화적 매력과 힘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매란방은 1930년에 미국 공연에 나서서 대성공을 거둔다. 당시에 <타임>이 중국을 성공적으로 선전한 사람으로 미국 의회에서 빼어난 연설을 해서 미국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과 매란방을 들었을 정도다. 당시에 중국인들이 이런 매란방에게 열광한 것은 당연했다. 서구와 일본에게 유린당하면서 구겨진 중국인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달래주고, 중국 전통문화의 힘으로 보여준 상징적 인물이 된 것이다. 천카이거가 영화에서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 미국 공연을 나선 매란방과 그의 미국 공연 성공을 부각시킨 것은 매란방이 미국 정복, 천카이거의 표현에 따르면 ‘서정미국(西征美國)’에 중국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매란방은 미국만이 아니라 일본도 정복한다. 총칼이 아니라 경극으로, 문화로 정복한다. 영화에는 15살에 경극을 처음 본 뒤 그대로 경극에 푹 빠져 버린 일본 군관 다나카가 나온다. 그가 중일전쟁 때 그의 상관에게 말한다. “지나(중국)를 정복하려면 지나 문화를 먼저 정복해야 하고, 지나 문화를 정복하려면 먼저 매란방을 정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매란방을 정복하지 못한다. 다나카가 “당신은 무대에서 한갓 계집에 불과하다”고 모욕을 주는 방법으로 그를 다시 경극 무대에 세우려고 하지만, 매란방은 “무대를 내려오면 나는 남자다”라고 되받으면서 그의 강박을 거절한다. 일본이 패전하자 매란방은 비로소 다시 무대에 선다. 영화로 보자면 중국의 승리는 중국 문화의 승리이고, 일본의 패전은 중국 문화를 정복하지 못하여 전쟁에 패한, 문화의 패전이다. 매란방은 그런 중국 문화의 상징적 아이콘이다.

 

현실에서 매란방은 친일 매국노도 항일 영웅도 아니었다. 관동 대지진 때 거액을 기부하기는 했어도 친일을 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항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떻든 천카이거는 매란방을 경극을 통해 일본을 제압한 인물로 그렸다. 천카이거는 여기서 매란방의 개인사를 존중하기보다는 2000년대 초반 중국의 문화적 분위기, 시대정신을 따르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에서 매란방은 중국 전통문화의 꽃인 경극으로 미국을 정복하고 일본을 정복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영화 속 매란방의 힘, 경극의 힘, 중국 전통문화의 힘은 문화 민족주의와 만난다.

 

요즘 중국은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느라 바쁘다. 전통문화를 앞장세운 소프트 파워 정책에도 지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 중국인들 역시 크게 공감하고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정책이 중국의 문화적 자부심을 알리고 중국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이러한 노력이 중국과 세계 사이의 새로운 소통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 중국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세계가 중국문화와 중국을 자발적으로 우러러 보게 만드는 방편으로 귀결된다면 문제다. 이러한 소프트 파워 전략은 궁극적으로 군사력을 앞세운 하드 파워 전략과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가 중국에 대한 세계인들의 오해와 편견을 제거하고, 중국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세계와 중국 사이의 소통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민족주의의 당의정과 첨병 역할을 할 때, 세계 속에서 중국문화는 진정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영화 <매란방>에 들어 있는 천카이거 감독의 중국 문화에 대한, 경극에 대한, 매란방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최근 중국 문화의 흐름과 맞물려 한편으로 의미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위험하다.

 

이 욱 연 (서강대 중국문화전공 교수)

(서남통신. 2009.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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