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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무엇이 투사를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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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4-02 19:55 조회17,3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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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면 <와이티엔>(YTN) 노동조합 위원장이 경찰에 강제연행돼 구금된 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그사이 초등학교 5학년인 그의 큰딸은 무릎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았다. 1998년 와이티엔의 경영위기 때 무급휴직을 하고서 어렵사리 키우며 공을 들였던 딸의 병상을 지킬 수 없었던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 특보 출신인 구본홍씨가 사장에 선임된 이래 소용돌이에 빠진 와이티엔의 노조 위원장에 출마할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기 때문일까?

 

그를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가 원칙주의자이긴 해도 투쟁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와이티엔 후배들의 그에 대한 인물평은 ‘아이디어가 많고, 순수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돌발영상’을 처음 만들어 와이티엔의 대표 상품으로 키우고 구글어스를 활용하는 등 뉴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람이 그였다. 이 덕분에 와이티엔의 시청률과 신뢰도가 높아졌고 그는 간판 앵커로 발탁됐다.

 

이런 그가 구속까지 각오하면서 노조 위원장에 나섰던 이유는 상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언론의 생명은 공정성에 있고, 공정성을 지키는 것은 언론인 본연의 의무다. 언론의 공정성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권은 대통령 특보 출신을 뉴스전문 채널의 사장으로 앉혔다. 이는 언론의 공정성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고, 언론인이라면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그런 사장을 거부해야 한다. 이게 그의 상식이었다. 그의 선배의 말처럼 “자기 잇속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앞세우고, 원칙을 중시하는” 그리고 동료들의 신망을 받는 그가 투쟁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상식이, 언론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만들기에 급급한 이 정권에선 통하지 않았다. 정부·여당은 와이티엔 재허가 불허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조원들을 협박하면서 구씨를 측면 지원했다. 구씨는 자신을 반대하는 노조 지도부를 해고한 것도 모자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고발하고 구속수사까지 요청했다. 여야 의원들이 제시한 중재안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상식을 존중하고 합리적 비판의식을 갖춘 기자일 뿐인 노 위원장을 투사로 만든 것은 바로 이런 정권의 몰상식이었다. 정권의 몰상식은 와이티엔 사태에 그치지 않는다. 언론장악을 위해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가며 언론관계법을 관철하려는 것이나 <문화방송>의 ‘피디수첩’을 기어이 처벌하려는 것을 보라. 용산 참사나 인권위 사태는 또 어떤가? 이 정권은 자신들이 보듬고 눈물을 닦아줘야 할 철거민과 세입자를 적으로 대했고, 지난 7년간 각종 차별을 시정하며 인권 증진에 기여해 국제적으로 나라의 위상을 높인 인권위를 국내외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력화하려 한다.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정권이 빚어내는 오늘의 현실은 마치 20~30년 전의 낡은 필름을 다시 보는 듯하다. 그러나 역사의 완전한 퇴행이란 있을 수 없다. 군사독재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피 흘리며 쟁취한 언론자유와 인권을 누리고 있는 국민들이 그토록 쉽게 포기할 리 없다. 이미 언론 현장에서, 인권 현장에서 그리고 생존 현장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수많은 노종면들이 보이지 않는가? 정권이 공권력을 무기 삼아 몰상식을 밀어붙이면 붙일수록 그에 저항하는 상식의 투사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이 정권이 정부에 대한 비판 허용은 민주주의의 기본요소라는 상식을 회복한다면 굳이 소모적 전투를 치를 이유가 없다. 노종면 위원장을 석방하는 게 그 상식 회복의 첫걸음이다.

 

권태선 논설위원

(한겨레. 2009.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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