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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수우미양가 투표’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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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3-27 09:11 조회17,3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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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궐선거가 이제 한 달 남았다. 이번 선거는 현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전국의 민심을 공식적으로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회다. 큰 선거로 가는 징검다리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작게 볼 것이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사람에게 선거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는 제도이다. 선거가 현대 민주제의 핵심 절차로서 만국 공통의 현상이긴 하나 그것이 과연 민심을 정확히 반영하는 수단인지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선거에 근거한 대의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사고하자는 급진적 제안, 그리고 좀더 나은 선거제도를 마련하자는 개선안. 후자의 움직임 중에 최근 세계 학계의 이목을 끄는 이론이 하나 있다. 이른바 ‘다수 판단’(majority judgment) 투표제도가 그것이다.

 

다수 판단 투표제는 현재의 단순한 다수결 투표제가 민의를 왜곡할 소지가 많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후보들 중 한 사람에게만 표를 던지는 행위는 유권자의 속마음을 정교하게 가리지 못하고, 다양한 동기와 판단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수 판단 투표제는 유권자에게 단순히 후보를 뽑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후보를 섬세하게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유권자는 각각의 후보에 대해 ‘수-우-미-양-가-거부’ 항목 중에서 하나를 골라 표시하게 된다. 이 결과를 전체 합산하여 각 후보가 얻은 평균 중위점수를 기준으로 당선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다수 판단 투표제를 고안한 프랑스의 정치학자 미셸 발린스키와 리다 라라키는 이 방법으로 각종 모의투표를 진행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지방자치 선거, 심지어 와인 품평에서도 기존 방식에 비해 대단히 흡족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2000년 미국 대선을 예로 들어 보자. 당시 소수후보 랠프 네이더는 2.74%를 득표하였다. 그런데 네이더를 찍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고어와 부시 둘만 놓고 본다면 고어 쪽을 더 선호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다수 판단 투표제로 선거가 진행되었더라면, 네이더 지지자들은 다음과 같이 투표했을 가능성이 높다. 네이더(수), 고어(우), 부시(미). 그러므로 네이더 지지자들의 차선책 점수 ‘우’가 고어의 전체 득표에 합산되었더라면 결과적으로 고어가 당선되고 부시 정권 8년의 악몽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플로리다주에서 다수 판단 투표 방식으로 2000년 대선을 재현해 본 결과도 마찬가지로 나왔다. 지난 한국 대선에 이 제도를 적용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워낙 압도적인 선거 결과였으므로 당락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겠지만 표차는 크게 줄었을 개연성이 있다. 물론 다수 판단 투표제 역시 이론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교적 간단한 변화를 통해 현행 선거제도를 혁신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녀 앞으로 서유럽에서 실제 시행될 가능성이 높은 제안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직접행동을 포함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공부해 왔지만, 대의민주주의의 자체적인 개혁방안에도 우리가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 현실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론적 지렛대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제 논쟁의 구도도 이와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의 오류가 만천하에 드러난 오늘날, 국가의 역할을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 하는 개혁방안에서부터, 더욱 비판적인 진보사상까지 백가쟁명의 시대가 열리고 있지 않은가. 전자와 후자가 건설적 교류를 해야 한다. 4월 선거에서부터 이 구상을 실천해 보면 어떨까.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09.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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