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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티베트의 오늘과 중국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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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3-11 08:53 조회17,8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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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의 해외망명을 초래한 티베트 봉기 50주년인 3월 10일과 작년 대규모 시위가 시작된 3월 14일이 다가오면서 티베트에서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8일에는 티베트인의 거주지역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고, 이 지역에 대한 중국정부의 경계도 강화되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정부와 티베트인들 사이에는 대규모 충돌만 1950년, 1959년, 1989년, 그리고 작년 등 4차례가 발생했으며 작년 사태의 여진이 여전히 계속 발생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티베트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계속 밝히고 있다. 작년 유혈사태 이후 달라이라마 측과 대화를 재개하면서도 달라이라마에 대한 비판의 고삐는 전혀 늦추지 않고 있다. 3월 7일 양제츠 외교부장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고 있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세계 각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용하거나 자국의 영토가 달라이 라마의 분리주의 기도에 이용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결코 안된다”고 강조했다. 중국정부는 티베트인들의 저항을 중국의 주권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티베트에 대한 강경한 정책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해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티베트의 긴장이 계속 고조될 경우 어떤 사태가 초래될지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에 따라 티베트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고려하면 국제적 관심이 중국 내의 티베트 상황을 개선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었으며 또 앞으로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긍정적 답을 하기 어렵다. 결국 많은 문제는 중국정부와 달라이라마 사이의 협상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중국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려되는 것은 중국정부가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중국정부의 판단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다. 우선 78세인 달라이라마의 연령은 멀지 않은 장래에 티베트인들이 그 구심점을 잃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티베트철도 개통이 상징하는 것처럼 티베트에서도 현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1959년에서 2008년의 중앙정부의 티베트 지방정부에 대한 재정교부금 누적액은 약 2019억 위엔인데, 2001년에서 2008년 사이에만 1541억 위엔에 달할 정도로 최근 중앙정부는 티베트의 현대화, 경제발전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티베트에서의 현대화는 장기적으로 종교적 열정에 기초한 저항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작년부터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티베트사태는 이러한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선 티베트 문제의 돌파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티베트청년회와 같은 더 급진적인 세력이 저항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화도 적어도 단기적으로 티베트 내에서 사회, 문화적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티베트에서 저항이 농촌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정부가 더욱 깊게 생각해볼 문제는 과거 티베트 사태가 중국의 이후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거나 적어도 그 변화를 예고했다는 점이다.

 

1959년의 유혈충돌은 중국공산당이 1950년대 중반부터 티베트에서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한 것에 티베트인들이 반발해 발생한 것이다. 중국정부는 1959년 사태를 티베트 인민들을 노예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자랑해왔다. 중국정부가 지난 3월 2일 발표한 “서장민주개혁 50주년”이라는 백서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다시 반복했다. 그러나 강제적이고 성급한 개혁이 티베트인들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그 결과 발생한 1959년 충돌이 티베트 문제를 지금처럼 악화시킨 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이념적 열망을 앞세운 급진적 개혁의 부정적인 영향은 티베트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1959년 5월부터 중국 전역에서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1961년부터 대기근을 초래해 수천만 명이 비정상적 원인(기아)에 의한 사망하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심화되기 시작한 중국공산당 내 노선갈등은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고, 국가기능이 사실상 중단되기도 했다.

 

1989년 3월의 충돌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정부가 문화대혁명 시기 좌경적 정책을 수정하여 소수민족의 종교, 문화에 대해 조심스러운 정책을 채택했지만, 이를 불충분하다고 여기던 티베트인들의 불만이 폭발된 것이다. 시위가 발생한 직후 3월 7일 계엄령이 선포되며 티베트 지역에서의 시위는 잦아들었지만, 불충분한 개혁에 대한 중국인들의 불만은 1989년 4월부터 천안문광장 시위를 통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 시위 역시 평화적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1989년 6월 4일 유혈진압으로 마무리되었고 이는 개혁개방 시기 발생한 가장 불행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일견 최근 티베트에서 긴장고조와 고도성장과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 있는 중국 전체의 모습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수년 동안 중국에서는 사회적 불안은 계속 증가해왔다. 비록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시위의 수, 충돌강도 등은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양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현대화의 그늘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티베트 정세가 계속 불안정해지고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비평화적으로 해결되는 가운데 중국이 번영과 안정을 구가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앞의 두 사태가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중국정부가 문제해결에 더 성의 있고 적극적인 자세가 취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내세우고 있는 화해사회 건설이라는 목표에 다가서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남주(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서남통신. 2009.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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