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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선진화의 문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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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2-09 09:50 조회18,0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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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앞날에 대해 비관이 늘고 있는 것 같다.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하면, 올해 한국의 성장률이 - 4%까지 추락하여 선진ㆍ신흥 20개국(G20) 중 꼴찌를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내수, 수출, 투자 등 집계된 통계치에 근거해도 그렇지만, 한 사회의 조정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최근 정황을 보면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용산참사ㆍ단호한 법 집행 시비

6명이 죽고 23명이 부상한 용산 참사에 대해 정부와 여당은 경찰의 적법 진압, 철거민들의 불법 시위라는 틀로 접근하였다. 금융기관과 미디어에 관한 법안에 대해서는 "국민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언급에 속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타박하거나 모른 척 한다. 일부 언론들은 점진적이고 성찰적인 대안을 충고하기보다는, 신속한 법 제정, 엄정한 법 집행 등과 같은 단호한 조치를 선창하고 있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고, 예감이 좋지 않다.

조급증과 소아병을 좀 진정하기 바란다. 그리고 뒷전에 밀쳐놓은 선진화의 장기 비전을 다시 한번 꺼내어 보았으면 한다. 경제사적으로 볼 때, 선진화의 문턱은 비인격적 교환을 보장하고 엘리트들에게도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체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현실세계에서는 거래자의 행위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지정되고 있다. 여기에서 규칙이 존재함으로써 교환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교환을 규율하는 규칙과 함께 그 규칙을 어떻게 집행하고 변경하는가 하는 문제는 경제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지배 권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의적으로 재산권을 변경할 경우 경제활동의 인센티브는 저하되고 체제에 대한 저항의 강도가 높아진다. 결국 국가는 위기에 부딪치게 된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정교한 규칙의 체계를 형성하고 그에 대한 신뢰할 만한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토대는 너무나 허약하다. 그래서인지 일부 엘리트들의 이익 실현에 국가나 법을 너무 자주 동원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경제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규칙의 덩어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규칙은 국가나 엘리트가 '엄정하고 단호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 경제학에서는 점점 더 주요한 관점이 되고 있다.

물론 규칙과 인센티브의 다발들이 법체계로 응결되고 입헌체제로 발전하는 데에는 정치적 요소가 필요하다. 이것이 선진화의 문턱인데, 이를 넘은 최초의 사례가 영국이다. 유럽의 변방에 있던 영국은 명예혁명을 통해 근대적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제도형태를 갖추었다. 영국에서도 1670년대 중반까지 권력에 의한 규칙 위반이 일상적이었다. 국왕은 토리당의 뒷받침에 기대어 휘그당의 대표권을 자의적으로 침해했다. 그러나 1680대 중반부터 토리당은 휘그당과 협력하여 국왕에 대항하는 정치적 국가를 형성했다.

비토권을 가진 참가자가 늘어나자 정부의 자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이 발생할 환경이 제한되었다. 1688년의 정치적 타협에 의한 권력 균형은 60여년 계속되었고, 유럽 대륙의 절대주의 체제에 비해 훨씬 강력한 제도형태를 마련했다. 입헌체제에 따른 재정혁명을 수행한 영국과 그렇지 못한 프랑스는 역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길을 걸었다.

취약한 사회세력간 타협기초

1690년대에 프랑스는 유럽의 헤게모니 국가였으나 1765년에는 거의 파산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의 길로, 영국은 산업혁명의 길로 갔다. 영국의 선진화에는, 토리당과 휘그당이 제도 변화의 틀에 타협했다는 것이 핵심요소로 작용했다. 이 협약에 기초해 국가가 체제로서의 안정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선진사회에서 법은 계약이지만, 후진사회에서 법은 강자의 칼이다. 한국에서는 어떤가? 사회세력 간 타협과 협약의 기초가 취약하기 짝이 없다. 선진화의 문턱이 자꾸 높아 보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울한 예감의 근원이다.


 

이일영 한신대 사회과학대 교수

( 한국일보 2009.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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