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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변화의 기대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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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1-20 08:03 조회17,8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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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벌써 뉴스는 미국에서 새 대통령 취임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오바마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는 미국 헌법이 제정된 곳이자 독립선언 당시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를 출발하여 158년 전의 대통령당선자 링컨이 취임식 참석을 위해 달렸던 경로를 따라 워싱턴에 도착하였고, 호사스럽게 성조기 디자인을 장식한 그 ‘오바마 열차’가 이동하는 6시간 30분 동안 철로변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여 환호를 보냈다. 이튿날 워싱턴의 링컨기념관에서 열린 축하공연 <우리는 하나>에서는 비욘세, 샤키라 등 유명한 가수들이 열창으로 관객들의 흥분에 보답하였다. 이제 불과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는 2백만 이상의 군중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 거라고 한다.

부시 시대의 억압적 분위기에 실망과 염증을 느끼던 미국인들로서는 오바마의 등장이 확실히 심기일전의 계기일 것이다. 9.11사태 이후 더욱 노골화된 미국의 일방주의에 분노하던 미국 바깥세계의 사람들에게도 오바마 대통령의 탄생과정은 미국을 단순히 강권적 제국주의 국가로만 단정지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인종적·사회적 소수자 출신의 인물이 민주적 절차를 거쳐 그 나라 최고 지도자의 지위에 오른다는 것은 미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라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바마는 8년전 앨 고어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대회장 입장조차 허락되지 않은 무명인사였던 것이다.

그의 당선 자체가 기적 같은 사건이요 큰 변화

그랬기에 선거기간 후반으로 갈수록 오바마의 우세가 점점 뚜렷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의 당선이 확정되자 그것은 미국체제를 뒤흔드는 기적 같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미국식 선거쇼에 냉담한 편이지만, 그런데도 그날밤 오바마의 당선수락 연설이 행해지던 시카고 랠리의 장면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면서 흥분했고, 특히 뒤쪽 구석에 서서 눈시울을 적시던 제시 잭슨 목사의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에는 깊은 감동을 느꼈다. 군중 속에 섞여 있던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우는 바람에 그 남자의 옷에 마스카라를 묻혔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아닌게아니라 오바마의 당선은 많은 지구인들에게 정서적 고양의 경험을 선사하였다. 실의와 낙담, 좌절과 침체의 시대에 이것은 물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당선의 감격이 지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할수록 오바마가 선거구호로 내걸었던 ‘변화’가 미국과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실상 미지수라고 해야 옳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의 당선 자체가 미국에 있어 하나의 변화라고 말할 수는 있다. 잭슨 목사가 말했듯이 그것은 마르틴 루터 킹 이래 40년에 걸친 고난과 투쟁의 결실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체제 자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다만 흑인집단이 본격적으로 제도권에 진입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오바마 자신은 정통적인 흑인구성원의 하나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케냐 출신 유학생과 백인 여성 사이의 혼혈일 뿐이 아닌가. 그러나 물론 그는 미국사회의 소수자임에 틀림없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흑인에서 찾았다. 그런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나라는 과연 때때로 그밖의 다른 모든 악덕이 무색해 보일 만한 미덕을 가진 나라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바와 같이 오바마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경제침체,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에서 시작된 군사문제일 것이다. 임기 4년 동안에 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기초를 닦고 다수 미국인들의 가슴에 확실한 희망을 갖게만 할 수 있어도 그는 성공한 대통령일 것이다.

쇠퇴하는 미국체제에 얼마나 변화가 일어날까?


그러나 오늘 미국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나 군사 분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들 아는 것처럼 미국은 세계제국 영국의 뒤를 이어 20세기 유일의 패권국가로 지구 곳곳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우리 자신의 경우만 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의 운명에 있어 미국의 위치는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리스, 이라크, 이란, 이스라엘, 칠레, 베트남, 기타 수많은 나라들의 현대사는 어떤 의미에서 미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미국이 정치적·경제적인 측면에서뿐 아니라 정신적·도덕적인 측면에서 감출 수 없는 쇠퇴와 몰락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 로마제국의 멸망에 빗댄 미국체제의 붕괴조짐을 분석하는 저서들은 오늘날 출판계의 유행처럼 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바마가 조타수로 등장함으로써 미국이라는 거함의 항로에는 어느 정도의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약간의 항로수정부터 근본적인 방향전환까지 다 검토되겠지만, 내 생각에는 결국 미봉책 이상의 것이 시도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 임기를 채우지 못한 두 명의 대통령, 케네디와 닉슨의 선례는 미국 주류사회 내지 기득권층의 정치적 대표자인 대통령이 그 이상의 꿈 또는 그 바깥의 야망을 드러낼 때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 보여주고 있는데, 현명한 오바마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깨닫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염 무 웅(문학평론가)

(다산포럼. 2009.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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