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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정치적' 엔지오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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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10-31 08:38 조회20,0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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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출장을 나간 길에 런던에 있는 엔지오 ‘빈곤과의 전쟁’을 방문했다. 단체가 입주해 있는 건물부터 이색적이었다. ‘윤리적 재산관리’라는 비영리단체가 운영하는 건물을 약 서른 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빌려 쓰고 있었다. 냉난방 시설도 없이 환경 친화적으로 설계된 빌딩이었다. ‘가치 있는 전쟁은 빈곤과의 전쟁뿐’이라는 모토를 내건 ‘빈곤과의 전쟁’은 설립된 지 60년 가까이 된, 직원 수 25명의 단출한 빈곤계층 지원단체다. 하지만 빈곤의 근본 원인과 문제를 용기 있게 비판하는 활동 덕분에 지명도가 상당히 높다. 예를 들어, 빈부격차의 심화를 이야기하면서 영국의 전통적 계급구조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 국내외를 통틀어 활동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이라크 개발지원과 인도적 구호사업을 하면서도 이라크를 침공한 나라들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8천명에 이르는 개인 후원회원 제도와, 노동조합 등의 단체 후원회원 제도를 이중으로 갖추고 있다. 후원회원 단체들이 한 달에 20만원에서 100만원 정도의 후원을 하면 ‘빈곤과의 전쟁’에서 후원단체의 모든 회원들에게 소식지를 발송해 준다. 개도국의 작고 경험 없는 단체들이 유럽연합의 재정지원 사업에 지원할 수 있도록 ‘프로젝트 신청대행’ 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시민사회단체와 정부와의 관계. 영국 정부는 ‘빈곤과의 전쟁’이 ‘정치적’ 엔지오인데도 그것을 빌미로 관계를 단절한다거나 재정지원을 통제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어떤 사업이 과연 납세자의 지원을 받을 만한 공익적 가치가 있는가 하는 점만을 본다. 또한 그것의 판정과정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는 자기 활동이 시민들의 확고한 지지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전력을 다한다. 이때 지지기반이라는 것은 단순히 재정뿐만 아니라 단체의 목표와 전략을 모두 의미한다. 지지기반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용역사업을 하며, 회비가 아닌 외부 재정지원 출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사업의 비율이 늘어나지 않도록 조심한다. 다시 말해 자기 단체가 표방하는 고유의 가치 곧 ‘구성적 도덕성’과, 단체의 활동 속에서 나타나는 수단적 가치 즉 ‘파생적 도덕성’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자 부단히 노력한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사례는 엔지오도 분명한 정치적 색채를 내걸고 활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형식적 비정파성에 안주하지 않고 뚜렷하게 정치성을 표방하면서도 정당과는 확실히 구분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시민단체로 남을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빈곤과의 전쟁’을 이끄는 존 힐러리 사무총장은 대다수 엔지오들이 ‘정치적 정체성과 정책적 정체성 사이의 정신분열’을 앓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기 단체는 이 둘을 일치시켜 단일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그 길이 어렵긴 하지만 훨씬 더 투명하고 일관성 있고 정신적으로도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과 훈련에 대한 열성도 놀라웠다. 사업이나 행사를 기획할 때 반드시 활동가들의 교육과 자기계발에 대한 차원을 고려한다. 인턴을 받을 때도 자기 활동가들의 훈련에 도움이 되는지를 검토한다. 엔지오 활동에서도 ‘인간에 대한 투자’ 개념이 확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활동가들의 외부 교육과 대학원 진학을 장려하는 것이다. 맥락이 다른 내용을 그대로 갖다 쓸 수는 없겠지만, 우리 시민사회가 진지하게 참고할 만한 대안적 본보기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08.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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