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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위험’에 처한 여성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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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10-11 11:59 조회22,8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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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배우’, ‘톱 탤런트’란 호칭에 걸맞게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20년을 우리 곁에 있던 최진실씨의 죽음은 내게 인정하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손쉽게 악플 탓이라 돌리며, 인터넷 정화사업을 벌이기 전에 한국 사회에서 이제까지 여성 스타를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해 왔는가를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1990년대 이후 한동안 여성 스타들의 이른바 ‘섹스 동영상’이 나돌았다. 이 사건은 기획사와 여성 스타들의 불평등한 관계를 잘 보여줬지만, 여성 스타를 포르노적 시선으로 소비하는 누리꾼을 대량으로 양산했다. 여성 스타는 기획사와 대중의 피해자임에도 늘 ‘응징’을 받았다. 한국의 스타 시스템은 여성 연기자가 장기간 대중문화 현장에 남아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전략을 모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모로 스타덤에 오르자마자 단시간 내 최대 이익을 만들기 위해 그를 정신없이 ‘돌리고’, 대중의 관심이 떨어지면 ‘버리는’ 방식을 채택한다. 배우는 시간을 들여 연기력을 연마하고 이에 따라 명예와 부를 성취해 가는 커리어란 점이 왜 여성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을까? 한국의 대중문화가 요구하는 여성 스타는 신비감을 주는 하늘의 별이 아니라, 재빨리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스타 시스템의 조급한 물질주의는 스타에 대한 ‘예의 없는’ 소비 방식을 만들어낸다. 스타는 자신의 스크린 이미지와 사생활을 적절히 결합하여 대중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여성 스타는 소비자에게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프라이버시를 지킬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성 스타는 스타의 노력과 연기력 때문이 아니라 대중이 계속 봐주고 좋아해주기 때문에 인기를 유지한다는 믿음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의 ‘소비 권력’은 여성 스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길들인다. 집의 침실을 텔레비전에 공개하고, 아이 낳은 직후의 부은 얼굴도 보여줘야 하며, 남편의 폭력이 자행된 현장이나 매 맞은 얼굴도 그대로 노출시켜야 한다.

 

광고 출연 단가가 누가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인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누가 더 노출한 드레스로 섹시미를 과시하는가가 레드 카펫의 하이라이트가 되고 있다. 이러한 대중 연예오락 산업에서 여배우는 ‘몸’으로 환원되고, 총체적 인격을 지닌 연기자로 취급되지 못한다. 나이 듦이 연륜이 아닌 추함으로 여겨지고, 복원될 수 없는 젊음을 성형을 통해 조형하도록 요구하는 대중문화 현장에서 여성 스타는 진정한 스타의 위상을 가질 수 있는가? 여성 스타들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희생자이며, 불안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최진실씨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인기를 얻은 보기 드문 연기자였다. 스크린에서는 이성애적 욕망을 부추기는 귀여운 여자였지만, 현실에선 고달픈 삶을 이겨낸 ‘살아 있는’ 여자였다. 그는 지난 20년간 우리를 위로했지만, 자신은 정작 스타가 누려야 할 연예산업과 대중으로부터의 예의를 얻어 내지 못했다. 연기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효가 다 돼 가는 여배우로 취급되고 있다는 불안이 컸을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취약하고 억척스러운 주부 역’만을 제안하며, ‘재기에 성공했다’는 가벼운 위로를 남발했다. 그는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지난한 싸움에 너무 지친 것 같다. 나 또한 예의 없는 팬의 한 사람으로 그의 죽음에 연루되었음을 깊이 반성한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한겨레. 2008.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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