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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미국 제국의 ‘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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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10-10 09:05 조회24,4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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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번역·출간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럽적 보편주의>의 서평을 준비하던 중 월가 금융사태의 역사적 의미가 궁금해졌다. 이번 일을 경제적 분석을 넘어 거시적으로 다룬 글이 얼마나 있는지 찾아보았다. 놀랍게도, 평소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해 별로 발언하지 않던, 또는 그리 급진적이라고 분류되지 않던 사람들이 아주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게다가 네오콘 이론가 중에도 이런 판단을 내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중도 혹은 보수 인사들조차 미국을 암울하게 본다면 정견이 아니라 현실적 근거로도 이 나라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할 이유가 많아지는 셈이다. 크게 보아 세 갈래의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현 사태의 역사적 선례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대다수 평자들은 이번 위기를 1929년의 대공황에 비견한다. 그러나 경제사가인 스콧 레널즈 넬슨은 19세기 말의 ‘원조’ 대공황이 오늘과 훨씬 비슷했다고 지적한다. 동유럽에서 시작해 서유럽을 휩쓸고 마침내 미국까지 삼켰던 ‘1873년 금융공황’으로 뉴욕에서만 순식간에 10만 이상의 실직자가 생겼고 동부의 여러 도시에서 무장 폭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미국인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 본격적으로 기울어진 것도 이때부터라고 한다. 이 사례가 왜 중요한가? 1873년의 사태가 역설적으로 세계경제의 중력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이다. 이 설을 받아들이면 이번 사건으로 세계경제의 축이 미국에서 중국과 인도로 이동할 계기가 마련됐을 개연성이 커진다.

 

둘째, 미국이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이번 사태를 당했는가? 얼른 꼽아 봐도 중동에서의 무모한 전쟁 그리고 천문학적인 채무가 떠오른다. 하지만 놓쳐선 안 될 사항이 또 있다. 모든 제국은 군사력과 같은 ‘단단한 권력’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권력’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부드러운 권력의 핵심은 헌법체계다. 성문헌법, 권리장전인 연방헌법 수정조항, 독립적 사법부는 근대 이후 미국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미국의 대법원은 헌법으로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원이다. 미국 헌법과 대법원 판례는 전통적으로 타국의 법정에서 자주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를 거치면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각국 법원에서 미국 판례를 인용하는 빈도가 급속하게 줄었다. 이런 나라의 법관들은 국제사회에서 인기가 없고 정의롭지도 않은 나라의 법을 더는 인용하지 않으려 한다. 단단한 권력과 부드러운 헤게모니가 곤경에 빠진 상황에서 경제위기마저 맞은 것이다.

 

셋째, 그렇다면 미국은 이제 총체적인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일까? 이사야 벌린을 잇는 영국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대가인 존 그레이는 이번 금융위기를 옛소련의 붕괴와 비슷한 차원으로 본다. 전세계의 지정학적 권력 판도가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우주인이 하늘에서 유영을 즐길 때 미국의 재무장관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반면 국제정치학자 로빈 니블릿은 미국의 상대적 약화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은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의 대안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가? 속단하긴 어렵다. 다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처칠의 표현대로 ‘끝의 시작’에 접어들었다고 가정하고, 우리의 지적 나침반과 삶의 양식을 전환하는 것이 현명하고 안전한 선택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불과 한 세대라는 ‘순간’ 속에서 옛소련 제국의 붕괴와 미국 제국의 몰락 개시를 직접 목격하는 희귀한 역사적 경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08.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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