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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영어논문은 수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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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8-29 09:34 조회23,1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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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면 대부분의 대학에서 새 학기가 시작된다. 요즘 전국의 대학교원들은 연구실적 때문에 무언의 압력을 많이 받는다. 그중 영어 논문이 주는 스트레스도 크다. 오늘날 영어 논문은 학계의 북두칠성이 된 듯하다. 미리 분명히 밝히고 시작하자. 필자는 영어(또는 외국어)로 논문 쓰는 것에 적극 찬성한다. 외국 도서의 우리말 번역도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학문이 발전하려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사상을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세계인권선언’에 나오는 핵심적 권리이기도 하다. 필자 스스로 오늘 이야기할 내용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도 솔직히 시인한다. 함께 성찰해 보자는 취지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한국 학자가 인문사회 영역에서 한국에 관한 연구를 영어로 집필하는 경우에만 초점을 맞춰 보자. 이런 연구에는 대략 세 유형이 있다. 첫째, ‘관광 가이드북’형 연구. 우리 상황을 정리·묘사한 글로서 새로운 학문적 공헌은 적지만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 독자에게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제일 많은 유형이다. 둘째, ‘인류학 보고서’형 연구.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이론을 가져와 우리 사례를 분석하거나, 우리 사례로 외국 이론을 보완 또는 반박하는 연구다. 독창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이 정도만 돼도 양호한 편이다. 셋째, ‘수출용 고급제품’형 연구. 세계 수준의 학문적 ‘보편성’을 획득한 경지라 할 수 있지만 이런 연구는 흔치 않다.

 

따라서 영어 논문이라 해도 모두 같은 차원에서 집필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의도하는 목적도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겐 상식적인 내용이라도 독자층과 맥락이 달라지면 나름대로 부가가치가 발생한다. 인문과학 논문 인용색인(AHCI)이나 사회과학 논문 인용색인(SSCI)과 같은 데이터베이스에 실린 논문 중에도 이런 연구가 많다. 우리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파악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외국 저널에 실리기만 하면 실제보다 더 크게 포장하고, 또 그렇게 떠받드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영어 논문을 장려하되 그 논문이 단순 소개인지, 계몽인지, 지성의 확장인지를 잘 분별하고, 거기에 맞춰 대접할 줄 아는 풍토다. 영어로 쓴 연구물이라 해서 그 수준이 자동적으로 높다는 보장은 있을 수 없다. 범용한 영어 논문이 우수한 한글 논문보다 더 높게 평가된다면 그것은 부당하고 모욕적인 일이다.

 

영어 논문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제언을 하겠다. 첫째, 영어로 쓴 논문이 공정하게 평가받으려면 그 내용이 우리말로 정확히 알려지는 것이 좋다. 백보를 양보해도, 공공재원에서 지원을 받은 연구인 경우 한국어 전체 번역문을 제시해야 마땅하다. 필요하다면 번역예산을 별도로 책정하자. 모든 국민은 납세자들의 피땀 어린 세금으로 이루어진 연구결과를 대한민국의 공용어로 읽을 권리가 있다. 둘째, 한글로 된 좋은 학술서나 논문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더욱 지원할 필요가 있고, 그런 일도 당연히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셋째, 한글이든 영어든 좋은 논문은 좋은 논문이고, 부족한 논문은 부족한 논문이라는 기본 전제에 합의해야 한다. 영어 논문에 무조건 인식론적 우위를 부여하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들이 취하기에 부적절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건 주체성이나 자존심의 문제 이전에 지성과 반지성의 문제다.

 

이런 상식적인 분별력 없이 세계적인 연구 대국을 꿈꾼다면 출발선에서부터 헷갈린 또 한 편의 희비극이 될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08.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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