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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도쿄 혹은 서울 컨센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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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5-15 08:57 조회17,9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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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후면 2004년 11월 이후 장기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재개를 위한 실무 협의가 시작된다. 일단 반가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래의 목표였던 동아시아 지역협력 강화를 제쳐두고 최근 수년간 미국을 상대로만 ‘다걸기’를 하겠다는 듯이 추진돼 온 한국의 자유무역협정 정책이 이제 다시 그 균형을 잡아가리라는 기대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한·일 양국은 공히 1990년대 말 서로를 첫 상대국으로 여기며 (그 이전에는 채택하지 않았던) 자유무역협정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으며 세계화 압력에 대한 지역주의적 공동 대응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맥락에서 한-일 자유무역협정은 단순히 두 나라만의 경제적 이익 확보 차원이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의 토대 마련을 위한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5년여 연구와 준비 끝에 개시된 한-일 협상은 6차 회담을 넘기지 못하고 결렬됐다. 양국 정부 모두 그것이 동아시아 차원의 거대 프로젝트임을 망각하고 자국의 좁은 경제적 이해관계에만 매몰됐기 때문이었다.

 

새로 협상이 시작된다 할지라도 이런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협정 체결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예컨대 일본은 여전히 농수산물 시장 개방에 난색을 보일 것이며, 한국은 제조업 분야에서의 각종 피해를 꺼릴 것이기 때문이다. 방법은 하나다. 높은 수준이 아닌 낮은 수준, 그리고 포괄적이기보다는 제한적인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장 개방의 대상과 수준을 각자 사정에 맞추어 줄이고 낮추자는 것이다. 이 일은 양국간 협정의 성격과 목표를 ‘본래의 것’, 즉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발전의 발판 구축이라는 것으로 되돌려놓을 때 가능해진다. 그림을 그렇게 크게 그리고자 한다면 세부 영역에서의 미시적 대립 지점은 감소하며, 따라서 양국간의 상호 양보와 타협, 그리고 협력 가능성은 증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한-일 자유무역협정은 일본이 선호하는 명칭인 ‘경제제휴협정’(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에 가깝다. 그리고 그 제휴의 궁극 목표는 두 나라의 경제관계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지역주의 발전에 있다.

 

두 나라가 이런 목표의식을 공유한다면 서로 협력하여 이룰 수 있는 멋진 일은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 공동체 실현에 가장 근본적인 기여가 될 수 있는 일은 이른바 ‘동아시아 자본주의 표준’의 설정일 것이다. 유럽연합(EU)의 성공 배경에는 유럽형 조정시장 경제체제라는 자본주의 표준이 있었고, 미국은 현재 미국형 자유시장 경제체제라는 표준을 앞세워 지역 및 세계 경제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지역공동체 혹은 경제통합의 진전을 위해서는 그 구성국가들 사이에 표준으로 작동하는 특정한 자본주의 유형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동아시아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서는 마치 미국 정부 주도로 작성된 ‘워싱턴 컨센서스’가 일종의 제도 개혁(?) 혹은 정책 지침서로서 다른 국가 혹은 지역의 미국식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데 큰 몫을 해 온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도 나름의 제도 디자인 합의가 이루어져 그것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제도 및 정책 개혁 작업이 일정한 지향성을 유지하며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과 일본이 경제제휴협정을 통하여 이러한 합의 도출 과정을 공동 주도함으로써 그 합의가 도쿄 혹은 ‘서울 컨센서스’로 명명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겨레. 2008.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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