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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미안하다, 아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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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5-06 08:39 조회18,3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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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이다. 사방에서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란 노랫말이 울려퍼진다. ‘어린이 지키기 원년’ 선언, 어린이 안전·권리 박람회 등 행사도 요란하다. 놀이동산은 아이들과 그들의 손을 잡은 부모들로 넘쳐난다. 그런데 부끄럽다. 그리고 미안하다. 어른들이 공모해 364일 아이들을 괴롭힌 후 하루 생색으로 때우려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보라!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중학교 1학년에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8만여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건강행태 조사는 청소년의 스트레스 인지율이 46.4%로 35.1%인 성인을 훨씬 웃돎을 확인했다. 20명 가운데 1명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해마다 그 가운데 200여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함을 통계청 조사로 알 수 있다. 또 서울시 학교보건진흥원의 조사에선 서울시내 초·중·고생의 25.7%가 특정공포증, 강박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이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정신질환자로 만들고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것일까? 답은 자명하지만, 굳이 확인해 보고 싶다면 ‘아동 및 청소년의 건강수준 및 보건의식 행태’에 대한 2006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를 보자. 12~18살 청소년에게 스트레스의 원인을 묻자 67%가 학업 문제를 든다. 진로(13.8%)·가정(6%)·친구(5.8%) 문제는 그 다음이다. 초·중등교육을 서열화된 대학의 위 칸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의 장으로 만든 결과다.

 

그러나 새 정부는 이도 성에 안 차는 모양이다. ‘학교 자율화 계획’이란 미명 아래 0교시 수업을 허용하고 학원 야간수업에 대한 규제를 풀었다. 또 학업성취도 평가 등을 모든 학생으로 확대하고 그 성적을 학교별로 공개할 태세다. 그러니 일제고사에 대비한다고 초등학생들이 마을 도서관을 점령해 버리는 웃지 못할 촌극까지 벌어진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아이들을 묶어놓는 우리 학교를 보고 “이건 야만이야, 집단수용소지 학교가 아니야”라고 개탄한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의 말이 귀에 쟁쟁한데도 한술 더 뜨기로 작정한 것이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가 중·고등학교를 넘어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에서까지 나올 지경이다.

 

이것이 인도주의에 대한 범죄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이들은 ‘국가경쟁력 강화’를 외치는 국가에 의해, 그리고 계층 재생산이나 계층 상승에 목을 매는 부모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간을 학교와 학원이란 감옥에 갇혀 원하지도 않는 공부를 강요당하는 일이 유엔이 금지한 강제노동과 뭐가 다른가? 강제자가 기업이 아닌 국가일 뿐.

 

유엔 아동인권협약은 18살 이하 모든 어린이의 인권을 보장할 책임을 국가에 지우고 있다. 어린이에게 최상의 것을 줄 인류의 의무를 전제한 협약은 어린이의 건강하게 자랄 권리, 육체적·지적·도덕적·정신적·사회적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받을 권리 등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91년 이 협약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올해 3월 시행에 들어간 개정 초중등교육법에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고 명문화했다. 그런데도 매일 자행되는 이 참담한 인권유린에 책임을 지는 이도, 책임을 묻는 이도 없다.

 

“학생당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어린 친구들의 한탄 앞에서 이런 범죄적 행위를 방조해온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차마 머리를 들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래, 학생당이라도 만들어라!” 하며 무책임하게 물러설 수야 없지 않은가.

 

권태선 논설위원

(한겨레. 2008.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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