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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속물이 지배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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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4-29 11:13 조회18,8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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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좋은 남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라. 괴로운 직장생활? 얼른 능력을 키워서 옮겨라. 속물이라고? 20대에 이렇게 살면 속물이고, 30대에 속물로 살면 현실적이라고 누가 말해주었나! 20대에 속물로 살지 않아도 30대가 되면 속물로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왕이면 하루라도 빨리 속물로서의 삶을 깨달아 행복에 조금 더 빨리 다가가도록 돕자.”

- ‘진정성’ 조롱받는 암울한 세태 -

“20대 여성들은 속물적인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과 그런 현실을 핏대 올려 비판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 이러한 갈등은 20대인 당신의 영혼과 미래를 갉아먹을 뿐이다. … 스스로 철저히 속물이 되자고 다짐하고 나면 현실적이고 확실한 선택을 하는 데 갈등이 없어진다.”

20대 여성을 겨냥해서 쓴 이 책은 나이 들어 인생을 즐기고 싶으면 20대부터 속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포럼과 관련해서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가장 가난한 세대가 된 20대가 읽으면 많은 이들이 이런 처세기법에 동의하고 따를 것 같았다.

지난 시대 우리 자신과 사회를 이끌어 온 힘의 바탕에 진정성이란 게 있었다. 시대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을 성찰하게 하던 윤리적 진정성, 그 고뇌의 시간 끝에 자신의 청춘을 걸고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렸으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고,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진정성은 시대의 모럴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진정성의 시대는 조롱받았고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속물이 되자고 외치는 책은 42쇄를 찍는데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책은 초판도 잘 안 나가는 현실이 되었다. 속물인 줄 알면서도 국민들은 속물을 정치지도자로 선택한다. 정말 속물인 관료들이 대거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아연실색했지만 아파트 재개발해서 가격 올라가게 해준다고 하자 다시 그들을 선택했다.

실용주의라고 하지만 스노비즘(속물 근성)이 이 시대의 철학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놉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정치권력을 갖는 사회, 이런 사회를 김홍중 교수는 스노보크라시라고 한다. 지배자 자신이 스놉이며, 스놉이 되지 않으면 정치권력을 가질 수 없고, 스놉으로 지지층을 구성하게 되는 스놉 지배, 그것이 또한 스노보크라시의 특징이라고 한다.

속물이 되라고 주장하는 앞의 책에서 저자는 자신 안에 있는 속물을 인정하되 속물이라고 광고하고 다니지는 말라고 조언하고 있고, 속물 마인드를 갖추되 자신을 귀족 대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남이 감히 나를 낮춰보지 못하도록 시정잡배 같은 거친 말투나 행동은 삼가고 아무렇게나 옷을 입지 말고, 오만 떨지 말고 소탈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스노보크라시의 맨 앞에 선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속물이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 ‘실용주의’로 포장한 속물주의 -

스놉은 경제적 부, 성공, 정치 권력,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철저히 속물이 되어 투쟁하지만 인정투쟁의 목적을 잊은 채 질주하는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성찰이 없다. 성공을 위한 도구적 성찰만이 있을 뿐이다. 도구적 성찰만이 있는 이들의 내면에는 주체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결국 존경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스놉들에 의해 다시 나락에 떨어지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것이 스노보크라시의 결과이다.

<도종환/시인>

(경향신문. 2008.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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