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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가난한 사람들과 적하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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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1-30 16:22 조회24,3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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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의 출장길을 도스토옙스키와 동행했다.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도 다시 볼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분명 ‘사랑 이야기’였는데 이제 보니 ‘가난 이야기’였다. 남녀 주인공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각자 혼신의 힘을 다하여 가난과 싸운다. 그러나 가난은 그렇게 개인이 노력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당신에게 은화 30코페이카를 보내드립니다. 더 이상은 드릴 수도 없습니다. 내일까지라도 어떻게 생활하실 수 있도록 가장 필요한 것을 사도록 하세요. 저희에겐 이제 남은 게 거의 없습니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슬퍼요! 하지만 당신은 슬퍼하지 마세요. 운이 없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이토록 노력했던 여자지만 그녀는 결국 가난에 몰려 마지막 글을 남기고 남자를 떠난다. “제 가슴은, 제 가슴은 지금 눈물로 꽉 차 있습니다. 눈물이 저를 조입니다. 저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습니다. 안녕히 … 당신의 가련한 바렌카를 기억해 주세요. 잊지 마세요!”

 

가슴 저미는 이런 가난 이야기는 19세기 초 러시아에서만이 아니라 21세기 초 한국에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을 터이다. 2006년 통계를 보면 우리 국민 열에 한 명은 최저생계비도 못 버는 절대빈곤의 상태에 빠져 있고, 다섯에 한 명은(중위 수준 소득의 반에도 못 미치는) 상대빈곤층의 삶을 살고 있다. 주지하듯 빈부 격차를 포함한 한국의 사회 양극화 수준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와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도 이 양극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한쪽에선 ‘747기’(연 7% 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달성, 세계 7대 강국 진입)의 비상을 꿈꾸지만, 다른 쪽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으로 신음하고 있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국민 대다수는 (가난을 그저 운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받아들인) 바렌카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전히 정부의 역할을 기대한다. 지난 대선에서 상당수 서민들이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던 큰 이유 중 하나도 새 정권이 들어서면 ‘죽어가는’ 서민경제를 살려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후보가 내세운 ‘넘쳐 내려가기’ 혹은 ‘적하’(trickle-down) 효과 창출 공약에 기대를 걸었다. 재벌이나 대기업 주도로 고성장을 지속해 가면 그 추가 성장분이 계속 흘러내려 결국 고용 확대와 중소기업 부양 그리고 분배 증진 등으로 이어지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성장의 적하효과는 결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화와 탈산업화 시대에 ‘고용 없는 성장’은 흔히 목격되는 현상이다. 설령 고용이 창출되더라도 비정규직 중심이라면 빈곤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 작금의 불공정 하도급거래 관행 등이 지속된다면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의 발전으로 이어질 리도 없다. 부자의 수입이 더 늘지라도 그것이 절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것 역시 아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성장률은 4∼5%를 유지했으나 사회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되지 않았는가.

 

성장의 적하효과는 오직 정책과 법·제도로 강제될 때만이 보장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부문과 내수부문, 강자와 약자, 있는 자와 없는 자 간의 상생관계가 공식적으로 구축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차기 정부의 성장 목표보다는 산업, 기업, 노동, 복지, 조세, 교육 정책 등이 과연 적하효과 보장기제로서 적절한 것인지를 늘 엄밀히 따져봐야 한다. 그래야 정권교체의 보람을 얻을 수 있다.

 

최태욱/한림국제대학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겨레, 200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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