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일] 아! 헌법 119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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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7-27 15:05 조회21,0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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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년 전이다. 아들과 함께 운동 삼아 한강변으로 자전거를 타러 나갔다가 사고가 났다. 무더위를 핑계로 평소와 달리 헬멧을 착용하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아들 녀석이 한눈을 팔다가 난간에 부딪쳐 곤두박질을 치더니 눈 위가 심하게 찢어지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결국 눈 위를 아홉 바늘이나 꿰매야 했다.) 주위에 사람도 없었고, 일반차량이 다닐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119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신속하고, 친절하고, 그리고 무료였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119 긴급출동 서비스가 참으로 고마웠다.
민생경제가 위기다. 재벌대기업들은 날로 비대해져 가는데 민생경제는 날로 위축되고 있다. 재벌대기업들의 불공정한 하도급 관행, 골목상권과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시장까지 침탈하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 세금 없는 상속을 노리는 일감몰아주기 등으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전셋값이 뛰고 물가가 오르면서 서민들의 한숨소리는 커져가고, 좁디좁은 취업 관문 앞에서 청년들의 좌절은 깊어가고, 노인들은 거의 두 명에 한 명 꼴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다보니 우리나라는 OECD에서 자살률은 일등이고 삶의 만족도는 꼴등이다. 무엇으로 위기에 빠진 민생경제를 구할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는 친기업정책에서 답을 구했다. 대기업들을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세금을 깎아주면 이들이 투자도 많이 하고 일자리도 많이 만들어서 결국 민생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재벌대기업의 자산비중과 계열사 수와 시장지배력만 커졌고, 민생경제는 오히려 더욱 도탄에 빠졌다. 박정희 개발독재시대 이래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성장만능주의, 불균형성장론, 선성장후분배론의 망령에서 깨어나야 할 때다. 이제 새로운 해법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헌법 119조 2항이 규정하고 있는 경제민주화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헌법 119조 2항에 주목하는 것은 지금 한국경제에서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이 판을 쳐서 “경제주체 간의 조화”가 깨졌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국가가 나서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하라는 것이 바로 헌법의 명령이다.
그런데도 최근 재벌의 대변지들이 앞 다투어 헌법정신 왜곡에 나서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119조 1항이 그들의 무기다. 어디까지나 1항이 기본이고 2항은 부수적이고 보완적인 조항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경제민주화를 하지 말자는 것인가? 논리적으로 1항에서 규정하는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전제되고, 이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2항에서 규정하는 규제와 조정이 뒤따른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2항을 무시하거나 경시해도 좋다는 법은 없다. 사실 시장경제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도 정부의 역할이 필수적이며 특히 재벌처럼 우월적 지위에 있는 경제주체를 규제해야만 자유로운 시장이 성립한다는 것이 근대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통찰이다. 자유시장이론의 본산인 시카고대학의 라구람 라잔도 특권적 지위와 독점이윤을 노리는 거대자본가들의 부당한 영향력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된 지 반세기가 흘렀다. 박정희의 쿠데타부터 6월 항쟁까지 첫 4반세기는 개발독재 체제 하에서 산업화를 추진한 시대였다. 이후 성립된 87년 체제는 정치민주화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으나 경제민주화에 실패하고 민생을 곤경에 빠트렸다. 내년이면 87년 체제도 4반세기를 맞이한다. 이제 근대화의 완성을 향한 마지막 3단계, 경제민주화의 시대를 열어갈 때다. 새 시대를 인도할 헌법 119조가 있어 고맙기 짝이 없다.
유종일 KDI 정책대학원 교수
(경향신문. 201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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